'오늘의 과제'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7/02/20 글쓰기 100제 : #010. 먼 기억 (2)
  2. 2007/02/09 글쓰기 100제 : #004. 비 (2)
  010. 먼 기억

  ―커다란 시험관 속에 인간의 형체를 한 무언가가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지저분하고, 혼탁하고, 군데군데 녹적색을 띤 녹이 슬어 있는 그것은 아무리 봐도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그만큼 인간을 본딴 무언가로밖에 볼 수 없는 인공적인 물건이었다. 오랜 고대의 역사 속에서 발굴해 낸 이것이 초보적이지만 그 당시의―아마 몇 만년은 족히 넘을―과학 기술을 추정하여 고려하자면 굉장히 정교하고 복잡한, 그 시대의 일반적 과학을 까마득할 만큼 훌쩍 뛰어넘어 있는 기계 장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발굴 즉시 이것은 현대의 과학자들의 손에 넘겨져서 조심스럽고 세밀한 수리와 복원 작업에 들어갔고, 드디어 원본을 최대한 보존하는 선에서 재기동이 가능할 정도의 선까지 복원하는 것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과거의 신비로운 유산이라 할 만한 '그것'이, 다시 한 번 새로운 생명을 받아 움직이기 직전의 순간에까지 온 것이다.
  그것의 몸 속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녹슬고 더러운 몸체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한 색과 광택을 가진 전선에서 전기 입자로 구성된 신호가 흘러들어갔고, 이윽고 그것은 천천히, 삐걱거리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고개'를, '몸'을 일으켰다.

  오랜 잠을 자고 일어난 사람이 흔히 그러하듯 그것은 잘 돌아가지 않는 관절부를 움직여 주변을 몇 번이나 둘러보고,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그리고 자신의 몸체에 달린 수많은 전선과 아마 강철로 되어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거무칙칙하고 부식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그것은 두개부 정면에 만들어져 있는 정교하지만 또한 조잡한 얼굴에 달린 '눈'이라 생각되는 부분에서, 끈적하니 검붉은 용액을 끊임없이 흘러나오게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그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존재의 '눈물' 처럼 보였기에, 과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에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의 내부에 존재하는 기억 장치라 생각되는 부분을 현대의 기술을 이용하여 가능한한 자세하게 분석해 보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몇 번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컴퓨터는 모든 분석을 끝마치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정보를 정교하게 조합하고 재구성하여, 인식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출력하였다. 그것은 대충 이러한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녀―지금으로써는 알아보기 힘들지만, 컴퓨터는 그것을 여성적 자아로써 분류했다―는, 먼 옛날 고대의 한 마법사의 손으로 만들어진 마법의 인형이었다. 과학과는 또 다른, 신비로운 힘의 순환을 통해 정의되는 학문으로써의 마법이 있던 그 시대에서도 그녀의 존재는 그야말로 그 시대의 모든 학문과 기술, 논리와 진리의 정수였다. 인간과 같은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는 인간이 창조해낸 그 무엇― 그녀야말로 신비로 가득차 있던 그 시대에 있었던 그 위의 신비라고 할 만했다. 마법사는 그녀에게 '마리온' 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녀는 그 때부터 마리온이라는 이름으로 마법사의 탑과 던전―그 시대의 마법사에게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소유물이었으나, 그 마법사의 그것은 매우 크고 넓었던 모양이다―안의 모든 존재들과 소통하고, 교감하며, 그들을 이해하고 또한 그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를 만들어낸 마법사를 포함한, 그녀의 모델이었던 인간조차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괴물은 괴물이 아닌 자신과는 또 다른 존재이자 친구였고, 위험한 던전은 그저 친구가 가득한 놀이터였다. 그녀는 마법사가 중심이 된 작은 세계 안에서 매우 행복하게,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녀의 창조자이자 부모라고 할 수 있는 마법사 단 한 사람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점차 지성이 늘어 가면서 자신과 마법사와의 신체적 차이를 인식함에 따라 그녀에게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망과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것에서 오는 갈등이 생기고 말았다. 통속적인 이야기에는 언제나 진실이 담겨 있다. 어째서 지성을 가진 존재는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 채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갈구하는가? 다만 인간이 궁극적으로 신이 되길 원했듯, 그녀도 인간이 아닌 무언가에서 인간으로 화하고 싶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는 그것에 의해 매우 오랜 시간을 고민했고, 결국 그녀는 그녀의 창조주인 마법사에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인간이 되고 싶다, 인간이 되어 살고 싶다, 라고.
  물론 그것은 마법사로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던 만큼, 마법사가 당혹해하며 그녀의 갈망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불가능한' 일이 아닌 그 마법사에게 '할 수 없는' 일이라 해석한 그녀, 마리온은 결국 인간이 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마법사 몰래 그녀의 집이자 세계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마법사의 탑을 빠져나와 세상을 향해 걸음을 내딛고 만다.
  그녀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아 몇 번이고 세계를 돌며 전설과 신화를 뒤쫓고 모험을 했으며 고명한 마법사(그녀의 창조주와는 다른)를 찾아 지식을 전수받기도 하고 신을 찾아 수행하여 신의 기적을 찾아 해메기도 했다. 그것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세계 전체에 퍼진 수많은 소문과 전설, 음유시인의 노래 등을 듣는다면―그것이 비록 진실과는 다르게 상당수가 와전되었다 하더라도―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인간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시간 속에서 파손되고 부서진 몸을 이끈 채 자신이 있었던 그 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탑에 접근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던전 안에서는 여전히 괴물들이―한때 그녀와 교감하며 소통할 수 있었던―횡행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매우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칼로 베고 자르고 찌르고 마법으로 없애 버리며 걸어갔다. 어느새 그것이 그녀에게는 당연한 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텅 빈, 마른 먼지와 어둠과 정적으로 가득찬 탑을 올라 최상층에 위치한 그녀의 아버지가 있던 방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그녀의 창조주의 시체와 대면하게 되었다.
  책상에 앉은 채 먼지로 화해 가는 마법사의 시체는 보기도 초라할 정도의 얇고 가는 백골로써 거기에 있었다. 그 뼈와 썩어 거의 남지 않은 육신은 누더기처럼 낡은 옷으로 감싸여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펜과, 다 말라 버린 잉크병과, 사그라들기 일보 직전인 누렇게 변색된 종이, 그리고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작고 투명한 병이 있었다. 그 안의 액채는 마법의 힘을 담은 채 지금까지도 반짝거리며 주변에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어쨌든, 그녀는 충격을 받아 잠시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관념은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충격은 그다지 깊지도, 그리고 절실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기 힘든 변화가 마법사의 몸에 일어났다는 것, 그 정도가 그녀가 받아들인 정보의 전부였다. 따라서 그녀는 곧 충격에서 회복하여 마법사의 시체 곁으로 다가가 마법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를 읽어보았다.

  「마리온에게 남긴다.
  인간이 되고 싶어했던 너에게, 내가 남겨줄 수 있는 것은 아마 이것 뿐인 것 같구나. 네가 사라지고 난 후, 나는 필사적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였다. 너의 바람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였지.
  …인간이 아닌 것을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가. 너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어찌 보면 가장 커다란 명제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인간뿐이 아니라 모든 생물은 그 생명을 가지고 있기에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고, 그것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신비로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단백질과 수분, 기타 몇몇 요소의 결합일 뿐인 이 몸에 '생명' 이라는 것이 깃들어 있고, 그것이 어떤 존재에게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한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지.
  그리고 나는 비로소 발견했다. 인간이 아닌 너에게 인간과 같은 몸과, 거기에 깃든 생명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하지만 나는 생명을 창조하는 방법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오직 생명이라는 것의 정수를 파악하고, 그것을 정제하여 가공하고 그것을 이동시키는 방법만을 알아냈을 뿐이다. 나는 너를 만들었지만, 생명까지는 만들 수 없었다. 그것이 아마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인지도 모르지.
  따라서 나는 네게 나의 생명을 남긴다. 이것은 너를 만든 내가 가지는 책임의 일부이며, 나는 그것을 실행하는 것 뿐이다. 그런 만큼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조차 너는 할 필요가 없다. 남은 것은, 내가 남긴 생명의 정수를 네가 흡수하여 새로운 몸과 생명을 네 것으로 하는 것이다. 여타 모든 변수는 이미 내가 모두 계산하여 고려해 두었으니 신경쓸 필요는 없다.

  이것을 보는 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 딸아. 새로운 인간의 삶을 살며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것이 아마 이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 될 터이니.」

  그녀의 눈에서 액체가 흘러내렸다. 인간이었다면 눈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은 눈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진하고 붉고 그리고 차가웠다. 그녀는 그제서야 마법사에게 도달한 '죽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생명이 사라진 후에 나타난 극적인 변화였다. 그의 생명은 그녀의 눈 앞에 있는 병 안에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명확한 일이었기에,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조차도 더 이상 마법사가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생물이라고 부를 수 없는 단순한 물건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이해했고, 그것은 그녀에게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과, 그리고 그녀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생각의 구조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녀는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나오는 그 붉은 액체야말로,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인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언제까지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이윽고 눈물을 멈추고는 파손되고 손상된 팔을 뻗어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병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입 안에 털어넣는 대신 그것을 가슴 한 켠에 가만히 끌어안은 채 마법사의 유해 바로 옆 발치에 조용히 앉았다. 그녀는 이미 마음 속으로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녀 나름의 죽음, 즉 모든 기동을 정지하고 그녀를 유지하는 모든 내부의 연결(인간이라면 혈맥과도 같은)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인간의 생명 대신 깊고 영원한 잠을 선택한 것이다.
  그녀의 눈이 감기고, 이후 그녀는 단 한번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렇게 시간의 모래 속에 묻혀 버렸다. 단단한 돌 속에서 그녀는 마치 화석이 된 것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긴 세월을 흘려 왔던 것이다.


  컴퓨터의 출력이 끝나자, 과학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혹자는 컴퓨터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했고, 또 다른 자는 기억 장치의 파손으로 인한 기억의 자연적인 훼손에 의한 재구성이라고 했다. 또 어떤 자는 조심스럽게,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간직하고 있던 진실이 아닐까 하며 알려지지 않은 과거의 기록에 슬그머니 동의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근거를 가지지 못한 채 단지 추측만이 무성한 그 순간에도 그녀는 유리관 안에서 계속해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그 자신조차도 이미 잊어버렸을 듯한, 혹은 이제 어디에도 남지 않은 옛 시간 속에서 단지 의식 가운데의 흐릿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을 법한, 그만큼 너무나도 먼 기억(記憶)이었다.

  * 참고로, 이 글은 구상 목록에 있는 '강철소녀 마리온'의 다이제스트입니다.
  004. 비

  딩동, 하는 소리가 텅 비어 있던 귓가에 파고들었다. 소파 위에서 뒹굴거리며 반 억지로 시간을 데리고 놀고 있던 나는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가 온다가는 일정도 특별한 연락도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반가워하고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사이 재차 초인종이 울렸다. 나갈께, 하고 외치면서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자 거기에는 예상했던 대로 어딘가 살짝 풀린 것 같은 인상을 지닌 그의 모습이 있었다.

  "으, 춥다. 오늘은 날씨가 흐려서인지 어제보다 더 추운 것 같네. 문 앞에서 기다리느라 얼어붙는 줄 알았다니까."

  그는 들어오면서 과장된 몸짓을 섞어 가며 호들갑을 떨어 보였다. 바깥이 실제로 추운지 따스한지 난 사실 잘 모른다. 며칠 동안 밖에 나가지 않은 채 집 안에만 있었더니 계절 감각이 사라진 것일까. 물론 그도 내가 요즘 들어 집을 나선 적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겠지. 그래도 내 옆을 스치는 그의 옷자락에서 희미한 냉기를 느낄 수는 있었다. 그저 농담만은 아니었던 것도 같다.
  나보다 먼저 거실로 들어간 그의 등을 곁눈질로 좇으며 현관문을 닫고 들어서다가, 옆의 신발장 문고리에 못 보던 회색 우산이 하나 걸쳐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들고 온 것이 틀림없다. 나는 그에게 가볍게 말을 걸어보았다.

  "이 우산은 뭐야?"

  "아까 하늘이 흐리다고 말했잖아. 일기예보를 보니 오늘 비가 올 확률이 육십 퍼센트 이상이라더라. 그래서 가지고 왔지. 난 델리케이트(Delicate)한 남자거든."

  몸에 걸친 외투를 벗어 적당한 곳에 걸쳐 놓으면서 그는 히죽 웃었다. 그 뻔뻔하리만큼 장난기가 가득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그는 방금 전까지 내가 앉아 있던 소파에 찰싹 하고 소리가 날 만큼 힘차게 걸터앉았다. 그리고 나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소리가 나지 않게끔 조용히 그의 옆으로 가서 그와 몸을 맞대고 붙어앉는다.
  그가 여기에 찾아오면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같이 앉아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딱히 일부러 말하거나 함께 의논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깨를 맞대고 몸을 붙인 채 앉아 있다 보면 어딘가 모르게 함께 있다는 실감을 얻을 수 있어서 좋다. 그와 내가 앉아 있는 소파의 정면에는 TV가 설치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가 함께 앉아 TV를 보거나 하는 경우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거의 없다. 애시당초 혼자 있어도 TV를 켜는 일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그가 TV 앞에 앉아서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는 풍경 또한 상상하기 쉽지 않다.

  우리는 잠시 그 상태로 가만히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조용하다. 하지만 전혀 지루하지도, 부담스럽지도 않다. 가끔은 이런 식으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대로 있을 때도 있다. 그건 그 나름대로 상당히 마음 편한 일이다. 혼자 있을 때의 편안함,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는 충실감. 좀처럼 양립하기 힘든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 그와 함께 있을 때는 그 점이 좋다. 물론 불만 같은 건 손톱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귀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는 단 한번도 거기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은 적은 없었다.
  그는 좋고 싫은 것을 확실히 표현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의 그런 점도 좋아하고 있다.

  *   *   *

  "그러고보니 말야, 비 좋아해?"

  막연히 내 옆에 앉아 있는 그에 대해서 생각하는 도중, 그가 조금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이것도 우리 사이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 만큼 나도 태연히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있었다.

  "별로. 비 오면 눅눅하잖아. 그리고 나갈 때도 불편하고."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 두 가지는 내게 있어서 상당히 곤란한 일이다.

  "하하. 그건 확실히 너에게는 별로 탐탁치 않은 부분이겠네."

  그는 실없이 웃으며 방금 생각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의 적당하게 마른 팔의 감촉은 하얀 털 스웨터의 아래에서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의 피부는 남자치고는 기묘하리만큼 얇아서 핏줄이 다 드러나 보일 것 같다. 나는 가만히 그의 겨드랑이 아래로 머리를 기대 보았다. 그의 심장소리는 느릿한 리듬을 타고 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왠지 잠이 몰려오는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약간 틀어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눈 앞의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입을 열어 그에게 말해 보았다.

  "넌 비를 좋아하는 거야?"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되돌아왔다.

  "…좋아해. 예를 들자면 비가 내릴 때 특유의 어두침침한 느낌이라던가."

  "그래서? 단지 그것 뿐?"

  그의 목소리에 주석을 붙이는 것처럼 멍하니 되묻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러면?"

  비로소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의 약간 장난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갑작스레 옆의 베란다 창문 쪽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직은 내리지 않는 모양이네."

  "뭐야, 말 돌리는 거야?"

  "글쎄. 어느 쪽일까."

  애매하게 말 끝을 흐리며, 그는 내 머리를 살짝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그다지 키가 큰 편이 아니고 그는 남자 중에서 대략 보통 이상은 되는 키였기에, 자연스럽게 나는 그의 품 속에 들어간 것 같는 형상이 되었다. 그의 가슴팍에 살짝 머리를 기대자 귓가에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그 상대로 손을 뻗어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체온 때문일까. 나른한 편안함이 나를 감싸안는 것 같은 기분에 한순간 잠이 확 몰려왔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몸을 약간 뒤척여 편한 자세로 그에게 몸을 맡기자 그는 내 머리 위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햇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거라서 그런 거야."

  그것이 방금 전 나의 물음에 대한 답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약간 시간이 걸렸다.

  "잠시 이대로 자도 좋아. 적당한 때에 깨워줄 테니까."

그의 손길은 여전히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왠지 멀게만 느껴지는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어느새 눈을 감은 채 깊은 심연 속으로 내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감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어느새 잠깐 동안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어깨를 살짝 흔드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흐릿한 시야 안에 내 몸을 감싸안은 그의 팔이 보였다. 나, 그의 품 안에서 자고 있었구나… 하고 나는 납득했다. 잠이 덜 깨서인지 아직도 머리가 살짝 멍한 느낌이었다. 그 애매하지만 기분 좋은 감각에서 가만히 침잠해 있자니 문득 그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들어봐. 지금 비가 내리고 있으니까."

  솨아아아―

  그에 의해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비가 내리는 소리를 인식할 수 있었다. 약간 낮고도 깔리는 듯한, 빗방울이 구름에서 지상을 향해 떨어지며 내는 무수한 소리의 집합. 지붕에도, 창틀에도, 나뭇잎에도, 유리창에도, 자동차에도, 누군가의 우산 위에도, 그리고 땅 위에도 비는 떨어지며 각각의 울림을 담은 소리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였다. 하나이며 또한 모든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이 아닌 어딘가 다른 곳에서 울리는 것 같은 희미한 공기의 떨림으로서 안개가 낀 듯한 나의 의식을 가만히 두드리고 있었다.

  "비의 목소리야."

  그가 가만히 이야기했다. 아니, 어쩌면 그가 말한 게 아닐지도 몰랐다.

  "이 소리를, 너에게도 들려주고 싶었어."

  아아. 그렇구나.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화음(和音). 거기에는 분명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울림'이 있었다. 그것을 대체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다시 잠이 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넓고 풍성한 그 울림을 몸 전체로 느끼며, 나는 다시 어둡고 고요한 잠 속에 녹아들어가고 있었다.

  *   *   *   *

  나는 차가운 소파 위에서 홀로 눈을 떴다. 거실 전체를 아우르는 어둠이 머리 위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도 잠시 멍해진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깨달았다. 그는 이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벌써 일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갑작스런 사고로 인해 그는 죽었고, 시체는 화장을 했다. 화장터의 굴뚝에서 느릿하게 피어오르던 푸르고 흐릿한 연기, 그리고 한 줌의 재가 된 그의 유골이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던 느낌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텅 빈 겨울 바다에 타고 남은 재를 뿌리며 나는 이상하게도 전혀 울지 않았다. 가슴이 뭉개지는 듯한 슬픔이 박혀 있었지만 왠지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옆에서 몇 번이고 마르지 않는 눈물을 흘렸던 그의 부모님과는 달리, 재가 허공에 흩어지며 바다로 가라앉는 것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나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것을 떠올리자마자 내게 지금의 현실이 명확하게 인지되었다. 나는 아무래도 꿈을 꾼 것 같았다.
  혼자가 된 이후 그의 꿈을 꾼 것은 처음이었다. 어째서? 왜 이제 와서? 그가 죽고 나서 나는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을 청할 때마다 찾아오는 깊은 어둠, 그리고 어느새인가 의식이 깨어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것은 이미 내게 있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1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그가 살아 있었을 때의 꿈을 꾸다니.
  의문은 곧 풀렸다. 소파 위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나의 귓가에 어떤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비가 내리고 있는 소리였다. 그것은 그가 살아 있었던 그 때처럼, 무언가를 속삭이는 듯 조용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랬구나. 그가 알려 주었던 너의 목소리가 나에게 그를 다시 만나게 해 주었던 거구나.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목구멍을 타고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솟아 올랐다.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앞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비의 목소리를 통해서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분명히 그 안에 있었다. 그것이 사무치도록 가슴에 전해져 와서, 마음을 두드려서…

  '이 소리를, 너에게도 들려주고 싶었어.'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비의 소리가 나를 감싸안고 있는 그 안에서 나의 목소리는 기묘한 떨림과 함께 결코 섞이는 일 없이 주변을 향해 퍼져나갔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제서야 겨우 할 수 있었던, 그에게 이별을 고하는 작은 의식(儀式)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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